다중인격? 해리장애의 유형과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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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한 행동이 기억나지 않거나 거울 속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이러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러한 ‘현실과 자기감각의 분리’가 반복되고 지속적이라면 해리장애(Dissociative Disorders)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리장애는 현실과 자아의 연결이 끊어진 듯한 상태를 특징으로 하며, 그 원인은 대부분 심리적 외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해리장애의 개념, 유형, 증상, 원인, 그리고 치료법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해리장애란 무엇인가?

해리(dissociation)란 기억, 정체감, 감정, 감각, 행동 등의 심리적 기능이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현상입니다. 정상적인 해리는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 중 멍해졌다가 도착지에 다다라서 “어떻게 온 거지?” 하고 생각하거나, 영화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을 잠시 잊는 것도 해리 현상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와 빈도가 심각하고, 일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킨다면 해리장애로 진단될 수 있습니다.

2. 해리장애의 주요 유형

미국 정신의학회 DSM-5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리장애 유형을 정의합니다.

  • 해리성 기억상실(Dissociative Amnesia)
    •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신상 정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인 건망증과 달리, 특정 사건이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선택적으로 사라집니다.
      • 예 : 큰 사고나 학대 피해를 받은 후 며칠 간의 기억 상실
      • 때로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 ‘해리성 둔주(fugue)’ 형태로 나타나기도 함.
  • 이인증/비현실감 장애(Depersonalization/Derealization Disorder)
    •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인증), 주변 세계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비현실감)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장애입니다.
      • 감정은 둔감하고, 마치 꿈 속에 있는 듯한 감각
      • 자아의 분리감은 크지만, 현실 판단력은 유지됨
  •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DID)
    • 과거의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해당하는 질환입니다.
      • 한 사람 안에 2개 이상의 서로 구별되는 인격 상태가 존재
      • 각 인격은 이름, 말투, 행동 방식, 기억에 차이가 있음
      • 주로 심각한 유년기 외상(trauma)과 관련되어 발생

3. 해리장애의 원인

해리장애의 대부분은 심리적 외상(trauma)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학대, 방임, 성폭력, 감정적 유기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해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의식에서 분리하여 생존하려는 심리적 기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고통스러운 경험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자아의 붕괴를 막고,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해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에게는 트라우마 당시 감정을 담당하는 별도의 인격이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해리는 병리라기보다, 일종의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해리장애의 치료와 회복

해리장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치료 역시 장기적인 심리치료 중심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 정신역동적 치료
    • 과거 외상과 감정적 기억을 탐색하여, 해리된 경험을 점차 통합합니다.
    •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의 경우, 각 인격 간의 의사소통과 협력을 유도하고 최종적으로는 통합된 자아 형성을 목표로 합니다.
  • 외상 중심 치료(Trauma-Focused Therapy)
    • 안전 확보 → 트라우마 기억 처리 → 자아 통합의 3단계 접근
    • EMDR(안구운동 둔감화 재처리법), TF-CBT 등도 활용됩니다.
  • 약물치료
    • 해리 자체를 치료하는 약물은 없지만 동반되는 우울, 불안, 불면, 자살 충동을 조절하기 위해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정서 조절 훈련 및 현실 접촉 향상
    • 이인증/비현실감 장애 환자의 경우 마음챙김, 감각 자극 훈련(grounding techniques) 등을 통해 현재의 현실과 연결되는 훈련이 효과적입니다.

해리장애는 단순히 ‘이상한 병’이 아니라 심리적 외상에 대한 인간의 적응적 반응입니다. 환자는 종종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으로부터는 오해와 낙인을 겪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치료와 지지를 통해 해리된 기억과 감정, 정체감을 점차 통합해 나갈 수 있습니다. 회복은 느리지만 가능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연결되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